컵을 꺼낸 건 그냥 물을 마시려고였는데,
싱크대 앞에 서서 수도를 틀고 나서부터 흐름이 조금 느려졌다.
물소리는 일정했는데 손이 따라가지 않았다.
컵이 반쯤 차는 동안 아무 생각도 안 했다고 말하기엔,
몸이 너무 가만히 있었다.

주방에 들어올 때만 해도 특별한 기분은 없었다.
방에서 바로 나왔고,
불은 그대로 둔 채였다.
바닥은 맨발에 차갑게 닿았고,
그 감각이 오래 남았다.
컵을 들고 있다는 사실도 중간쯤에서 희미해졌다.
처음엔 그냥 아침이라 그런 줄 알았다.
잠이 덜 깼다거나,
창가 쪽에서 들어오는 빛이 애매해서 시선이 거기로 갔다거나.
주방 불은 켜져 있었고,
수도 아래에서 반사되는 빛이 싱크대에 퍼져 있었다.
어디서 멈췄는지 생각해보면 딱 집히는 지점은 없다.
전날 미뤄둔 일도 있었고,
책상 위에 놓인 종이도 떠올랐지만 그게 직접적인 이유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런 것들은 늘 같은 자리에 있었고,
그날도 달라 보이진 않았다.
물은 계속 흘렀고 컵은 점점 차올랐다.
넘칠 것 같다는 생각보다,
이 장면이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더 먼저였다.
손에 힘을 주면 바로 끝날 일이었는데,
그 동작이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에 특별한 감정이 있었던 건 아니다.
불안하다거나 답답하다거나 하는 말로 설명하기도 애매했다.
그냥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은 상태에 가까웠다.
멈췄다기보다는 연결이 끊긴 느낌이었다.
주방 창문 너머로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문을 닫는 소리인지,
차가 지나가는 소리인지는 구분하지 않았다.
컵 안의 수면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게 보였고,
그게 이상하게 오래 눈에 남았다.
그 상태가 얼마나 갔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몇 초였을 수도 있고,
생각보다 길었을 수도 있다. 몸은 멀쩡했고,
서 있는 자세도 불편하지 않았다.
다만 시간이 흘렀다는 감각만 어딘가 빠져 있었다.
결국 손이 움직였고 수도를 잠갔다.
컵은 거의 가득 차 있었고,
조금 넘친 물이 싱크대 가장자리를 타고 흘렀다.
수건을 꺼내 닦는 동작은 별다른 생각 없이 이어졌다.

방으로 돌아와 책상 옆에 컵을 놓으면서도 아까의 정지 상태는 딱히 정리되지 않았다.
그냥 중간에서 끊긴 장면처럼 남아 있었다.
그날 하루는 평소처럼 흘렀지만,
그 장면만 따로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