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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마시려다 컵만 만지고 내려둔 순간

by 정리되지 않은 기록 2026. 3. 1.

주방 불을 켜자 하얀 불빛이 식탁 위로 먼저 떨어졌다.

밤이라 그런지 공간이 조금 비어 보였다.

싱크대 앞에 서서 컵을 하나 꺼냈다.

유리컵이 손에 닿자마자 차가운 감각이 또렷했다.

수도 꼭지에 손을 올려두고 잠깐 그대로 있었다.

물을 틀기 전의 고요가 길게 이어졌다.

 

컵 안을 들여다봤다.

아무것도 없는데 괜히 안쪽을 한 번 더 확인했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일정하게 들렸다.

그 소리 사이로 내 숨이 섞였다.

 

컵 가장자리를 엄지로 문질렀다.

마른 자국이 남아 있는 것 같아서 손바닥으로 한 번 더 닦았다.

물을 마시려고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이 뒤늦게 떠올랐다.

그런데 목이 마른지 아닌지 잘 모르겠었다.

 

컵을 싱크대 위에 살짝 내려놓았다.

바닥에 닿는 소리가 생각보다 단단했다.

다시 들어 올릴까 하다가 손을 빼버렸다.

컵은 그대로 있고 나는 한 발짝 물러섰다.

주방 조명을 끄지 않은 채로 잠깐 서 있었다.

밝은 불빛 아래 놓인 컵만 조용히 남아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