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을 쥔 건 분명 무언가를 쓰려고였는데,
종이 위로 바로 내려가지는 않았다.
손 안에 감긴 감촉은 익숙했고,
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지만 그 다음 동작이 이어지지 않았다.
펜은 공중에서 잠깐 머물렀다.
책상 위에는 이미 몇 장의 종이가 펼쳐져 있었다.
글자가 적힌 것도 있었고,
빈 칸으로 남아 있는 부분도 보였다.
펜을 내려놓을 자리는 충분했는데,
어디가 맞는지는 바로 정해지지 않았다.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기보다는,
쓰는 쪽으로 가지 않았다는 쪽이 더 가까웠다.
문장을 떠올리지도 않았고,
지워야 할 말도 없었다.
그냥 손이 멈춰 있었고, 그 상태가 잠깐 유지됐다.
펜 끝이 종이에 닿으면 소리가 날 거라는 생각이 스쳤다.
사각거리는 소리인지,
가볍게 긁히는 느낌인지 정확하진 않았다.
그 예상만으로도 동작이 늦춰진 것 같았다.
결국 펜은 종이 위가 아니라 책상 위로 내려갔다.
원래 놓여 있던 자리에서 조금 벗어난 곳이었다.
굴러가지 않게 방향을 잡는 데만 손이 움직였다.

펜을 내려놓고 나서야 손이 비었다는 걸 알았다.
손바닥에 남은 압력이 천천히 사라졌고,
손가락은 자연스럽게 책상 가장자리에 닿았다.
쓰지 않은 상태가 그대로 유지됐다.
그 이후에도 펜은 한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
다시 들 수도 있었지만,
그럴 필요는 생기지 않았다.
다른 일을 하면서도 시야 한쪽에 펜이 남아 있었다.
나중에 보면 아주 짧은 구간이었을 텐데,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다시 내려놓은 그 순간만은 따로 잘려 나와 있었다.
쓰지 않은 이유보다,
내려놓았다는 동작만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