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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들고 있던 펜을 다시 내려놓은 순간

by 정리되지 않은 기록 2026. 2. 21.

펜을 쥔 건 분명 무언가를 쓰려고였는데,

종이 위로 바로 내려가지는 않았다.

손 안에 감긴 감촉은 익숙했고,

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지만 그 다음 동작이 이어지지 않았다.

펜은 공중에서 잠깐 머물렀다.

 

책상 위에는 이미 몇 장의 종이가 펼쳐져 있었다.

글자가 적힌 것도 있었고,

빈 칸으로 남아 있는 부분도 보였다.

펜을 내려놓을 자리는 충분했는데,

어디가 맞는지는 바로 정해지지 않았다.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기보다는,

쓰는 쪽으로 가지 않았다는 쪽이 더 가까웠다.

문장을 떠올리지도 않았고,

지워야 할 말도 없었다.

그냥 손이 멈춰 있었고, 그 상태가 잠깐 유지됐다.

 

펜 끝이 종이에 닿으면 소리가 날 거라는 생각이 스쳤다.

사각거리는 소리인지,

가볍게 긁히는 느낌인지 정확하진 않았다.

그 예상만으로도 동작이 늦춰진 것 같았다.

 

결국 펜은 종이 위가 아니라 책상 위로 내려갔다.

원래 놓여 있던 자리에서 조금 벗어난 곳이었다.

굴러가지 않게 방향을 잡는 데만 손이 움직였다.

펜을 내려놓고 나서야 손이 비었다는 걸 알았다.

손바닥에 남은 압력이 천천히 사라졌고,

손가락은 자연스럽게 책상 가장자리에 닿았다.

쓰지 않은 상태가 그대로 유지됐다.

 

그 이후에도 펜은 한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

다시 들 수도 있었지만,

그럴 필요는 생기지 않았다.

다른 일을 하면서도 시야 한쪽에 펜이 남아 있었다.

 

나중에 보면 아주 짧은 구간이었을 텐데,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다시 내려놓은 그 순간만은 따로 잘려 나와 있었다.

쓰지 않은 이유보다,

내려놓았다는 동작만 남아 있었다.